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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나눔

고난 너머의 기쁨 (시편 51편, 요한복음 16장)

by Holy Worshiper 2020. 4. 15.

고난 너머의 기쁨

1. 회개하는 자에게 회복시키시는 주님.

(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가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피조물들이 모두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들이 되는 것인데, 그냥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노래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마음속으로 깊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존재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선재되는 조건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다. 호세아 서에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

(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시는데, 예배가 중요하고 찬양이 중요하지만 그런 외형적인 것보다 더욱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호세아서는 호세아가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증언하였는데, 이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 했습니. 번제도 드리고 제사도 드리고. 얼핏 보면 율법의 요구들 즉 하나님께서 명하신 요구들을 지킨 것처럼 보였습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질돼 버린 그들의 삶의 모습을 책망하시면서 지금 너희들이 지니고 있는 모습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본질은 잃어버리고 껍질만 남은 모습.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은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기를 너희가 이렇게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믿음을 갖고 내 마음을 모르고 너희 마음대로 생활한다면 이어지는 파멸은 어쩔 수 없다고 심판에 대해 엄히 경고하십니다.

그 경고의 말을 듣는 것은 우리를 고난 중에 빠뜨리게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하고 기쁨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 51편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바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을 때 그가 기록한 기도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나단 선지자의 말에 바짝 엎드립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으로써 그 정도 부정도 못 저지를까요? 당시에 왕의 권세가 얼마나 강한데, 그리고 아무리 나단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왕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 왕을 책망할 수 있는가요? 나단은 다윗왕을 엄히 책망합니다.

(삼하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놀랍게도 다윗은 이런 책망 앞에 무릎을 꿇습니. 자신을 변호하려 들지 않고 상황에 대해 핑계하려 하지 않습니. 눈물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우리는 오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나 보며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부딪히고 범죄자가 아닌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기를 축복합니다.

2.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우리의 옛 고사성어 중에는 성경적인 원칙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말들이 많이 있습니. 그중 한 가지가 고진 감래입니다. 괴로운 것이 다하게 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 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내주시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려고 내려오셨습니다.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아기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신 예수님. 스스로 인간이 되어 내려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전능자이신 그분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로 오셨습니.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에 대해 알려 주셨는데, 그분의 구원 사역에는 십자가를 반드시 통과를 해야만 하셨습니.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람이 없고,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저주받는 우리를 구원해 내시기 위한 방법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한 것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죽음이 그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 예수님께서는 이를 말씀하십니다.

(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세상 권세는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막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을 근시안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제자들로 대변되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신비였습니. 세상이 기뻐하였지만 그것은 신비의 시작이었고,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됐습니.

이것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크신 지혜를 이해할수 있는가? 그것은 신자들에게 열어주신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이 비밀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사건은 단번의 사건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들의 삶에까지 연결되어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지금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혹은 예수님을 믿는 다고 손해를 보면서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은 지금 우리의 삶이 곤하고 어려울지 모르나 세상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주님께서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셨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될 것인가 기억하며 주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살지만 어제보다 더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지금은 근심할 수 있지만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바라는 주의 종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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