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말씀 나눔

순교자의 길을 가는 성도 (사도행전 7장)

by Holy Worshiper 2020. 4. 18.

순교자의 길을 가는 성도.

할렐루야.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몇 년 전 뉴스에 중국에서 5억을 들여 높이 36미터의 마오쩌둥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가 결국 전 세계의 많은 비난 여론에 밀려서 철거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마오쩌둥을 높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많은 종교들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강원도 동해안 낙산사, 설악산 신흥사를 가보면 여지없이 거대한 불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낙산사는 저녁에 속초쪽에서 차를 타고 오다 보면 여래상이 커다란 조명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설악산 입구에는 앉아 있는 거대한 불상이 자리 잡아 오가는 이들에게 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휴휴암에도 여래상이 있는데, 그 역시 굉장히 크기가 큽니다. 왜 이렇게 크고 거대하게 만드는가 하면 우리 사람들의 시선은 크고 높은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시선은 크고 높은데 있습니다. 그래서 거대하고 성공하고 잘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크고 잘나면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측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 조차 크고 좋고 높은 것들에 더 많은 관심과 초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왠지 이 시골의 작은 교회보다는 크고 거대한 예배당에 하나님이 계실 것 같습니다. 작고 초라한 교회. 심지어 도심에 있으면서도 상가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들을 보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우리가 크고 커다란 것들을 좋아하듯 하나님도 큰 교회를 사랑하실까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주님의 영광은 아무리 몇천 몇만 명이 모이는 교회든 건물이든 간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시니다.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이고 하나님의 발등상은 땅입니다. 그 거룩하신 주님은 어느 곳으로도 다 담을 수 없지만 우리 마음속을 성전 삼아 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아름다운 교회는 작다고 주눅 들지 않고 크다고 교만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 주님만 높이며 성경을 바르게 아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인 것입니다.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돈과 명예와 인정만을 갈구하는 세속적인 교회는 오히려 이미 더 타락한 곳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겸손히 찾고 구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든지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일곱 명의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맡아서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의 핍박과 시기가 말도 못 할 정도로 거셌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행전 7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초대교회에서 무엇을 전했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초대교회에서 전한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우리는 연약한 죄인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돌이켜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모시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모시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인정해야 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 태도입니다.

자 그렇게 예수님을 전한 스데반은 어떻게 됩니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스데반이 전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를 막고 소리를 지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스데반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비난을 당해야만 했고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부귀영화만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설사 우리에게 크고 좋은 부귀영화를 약속하셨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내 이름을 높이고, 나를 자랑하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유독 많이 가진 자의 책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자는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얻은 부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였고, 자기 집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나사로를 보살피는 데는 무책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힘이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만 도움을 준 전형적인 개인 주의자였습니다.. 많은 부를 갖고 명예를 갖고 있었음에도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 너의 형제를 사랑하고 돌아보라는 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이 부자에게 있어서 거지 나사로는 형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그는 자신만을 위해 소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봤을 때는 이 부자가 큰 복을 받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여러 티브이에 나와서 명사 특강을 하였을 것이고, 유튜브 스타로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는지를 강의했을 것이고 그의 책은 불티난 듯 팔렸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추켜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귀영화가 그에게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무를 저버린 그는 이름 석자 조차 남지 않는 그저 초라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는 심지어 그의 영혼이 지옥에 빠져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반해서 거지 나사로는 어떠했습니까? 사실 성경을 보면 왜 나사로가 거지가 됐는지, 그리고 그가 거지로서 무엇을 하였는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기보다는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 이름 석자를 이 땅에 새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 생명 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유독 지탄의 대상이 되는 곳은 교회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서도 교회는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로마 황제는 기독교를 탄압했고, 기독교인들을 희생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200년 전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서학, 양학이라는 이름으로 천주교가 들어왔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목이 베어 죽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일본의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교회는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교회에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교회의 생명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구별된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섬기고 세속적인 것을 버리는 곳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시대정신을 짊어졌고,, 교회가 사회의 타락을 막는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핍박하면서도 오히려 교회는 성장했고, 탄압을 당하면 당할수록 교회는 이상하게 부흥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의 탄압은 과거와 다릅니다. 교회가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병균을 옮기는 도구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물론 다 맞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가 주님의 길을 잘 따라갔다면 교회의 정신이 십자가였다면 달라졌을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장소가 되어야지 절망을 주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믿음의 길은 부귀영화가 보장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보장된 길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섬기는 길이고, 그것으로 내 이름이 하나님의 나라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아무리 능력과 힘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그보다 우리가 더 기뻐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보잘것없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이름이 기록되겠습니까?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다시 오늘 성경의 스데반을 한편 살펴보겠습니다.. 스데반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것일 뿐이었고 그를 죽인 것은 사람들의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많은 사람들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짐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입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죽는 길이 열매를 맺는 길이고 사는 길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평생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요단강 가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푼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헤롯에게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잃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친교 집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 십자가를 통해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고 초라한 유대 땅 베들레헴. 말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께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천대받던 목동 들이었습니다. 이방인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주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곳이고 내가 희생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3장11절 1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로 우리도 이런 주님의 모습을 따라 하나님의 자리로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자리가 어디라고요? 바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줄 서서 세례를 받는 자리. 문안을 받고 인사를 받기보다는 내가 먼저 섬기는 자리입니다. 점점 살면서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닮기보다는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더 높은 자리. 인정받는 자리. 내가 이룩한 어떤 성과에 있는 자리로 점점 높아집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마귀가 좋아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주님이 태어나신 마구간의 자리이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곳이 주님이 역사하시는 자리입니다.

코로나 사태는 교회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집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게 요청하기를 제발 모이지 말라 하지 기도해달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민폐만 끼치지 말라고 하지 어떤 것도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핍박이라고 여기고 더욱 열심을 다해 모이기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죽고, 목사가 죽고, 교회가 죽는. 그 죽음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과연 우리는 어떤 편에 서 있습니까? 내가 죽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려놓은 성도, 희생하는 교회. 내려놓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고 십자가의 신앙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참된 죽음은 이후에 부활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죽고 주님으로 다시 사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