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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나눔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by Holy Worshiper 2020. 5. 3.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 민국은 비탄에 빠졌다. 죄없이 죽은 수많은 학생들. 구조를 기다리며 배에 있었던 학생들은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한채 죽어야 했기 때문에. 전 국민에게 죽음의 순간이 생생해 방영되는 그 순간. 모두들 기도했지만, 결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배는 서서히 가라앉았고, 결국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한채 그렇게 아이들은 사라졌다.

이사건이 이후, 사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한 질문이 끊임 없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비단 이 순간만의 질문만은 아니다. 우리 인생에 내가 원하지 않는 어려움들이 끊임 없이 닥쳐온다. 질병의 문제 물질의 문제, 자녀의 문제등 말이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 하셨고,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는 허망한 일들이 아닐수 없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쉽게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무언가 우리가 잘못한게 있겠지, 고난 끝에 열매가 있어.

일부분 맞는 말들이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또 다 맞는 말이 아니다. 사실 그 어느것도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저자의 고민이 담겨 있는 책이다. 저자는 어머니를 잃었을때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세월호의 악몽을 마주대했다. 사실 꺼내기 조심 스러운 입장이지만, 결코 두렵다고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신정론의 문제를 당당하게 꺼내어 재평가를 시도한다. 과거의 신정론은 세상의 악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 편을 드는 모습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했듯이 신정론에 대한 모든 철학적 시도는 실패인 것이다. 신학적 시도 역시 마찬 가지이다. 누가 그 신정론에 대해 말할수 있겠는가?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에서 그 고통을 이길수 있는 대안을 찾는다.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 아들을 잃어 버린 경험이 있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볼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원인을 묻는 신앙이 아니고, 이것을 극복할 신앙임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악의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할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안다한들 우리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악의 원인에 대해 궁금하지만 안다고 한들, 거기서 무슨 대안이 있고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이것을 극복해야할 힘을 주는 것이 기독교의 과제이다. 잘 아는둥 떠들지 않는 것이 기본이리.

정리.

1.하나님은 왜 침묵 하시는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게 아니라.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위로해 줄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덤덤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심판 하시고, 고통 당하는 자들의 영원한 버팀목이 되신다. (184)

2.악인이 왜 형통하는가?

왜 우리는 악인이 형통하는 시대를 용인하는가? 우리는 왜 입으로는 정의롭고 선하게 살라고 하면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 하는가? 왜 우리는 악에 맞써 싸우지 않는가?

하나님의 방법은 악인에게 폭력으로 갚으시는게 아니라, 사랑을 베푸심으로 부끄럽게 하신다. (187)

3.하나님은 무슨 일이니 다 하실 수 있는가?

그분의 전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능이 아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힘은 약함에서 온전해 진다. 아버지는 져주는 아버지다. 사랑의 아버지 되심을 분리해서 전능을 생각하면 무자비한 독재에 불과하다.

4.모든 일이 예정된 것이라고?

칼뱅이 예정론을 강조했을 때, 그는 예정과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당시 카톨릭에서 쫓겨난 신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가톨릭 교회는 너희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선택하셨다는 위로와 용기를 주고자 위함이다. 이런 문맥을 도외시하고 세상 모든 일에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니므이 예정이라는 딱지를 무책임하게 붙인다면 귀중한 신앙 고백은 다시 비웃음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192)

5.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신학은 수학처럼 상황과 상관 없는 고정의 해답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활동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창조세계 한 복판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억압자가 아니라. 당하는 자의 편이고,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의 편임을 고백한다. 이 지옥같은 세상에 신앙은 결코 굴하지 않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 섭리, 그분의 창조와 구원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미래이며, 성취되어야 할 약속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뜻 없이 무릎 꿇거나 운명에 붙들려 살지 않는다. 도리어 생명과 창조의 역사를 향해 일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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